공터에서 – 김훈 (2017)

김훈의 소설에는 언제나 어려운 단어들이 많이 나온다. 본인만 쓰는 한자 조합인지는 모르지만, 어쨋든 소설을 읽으면서 국어사전을 찾아봐야 하는 생각을 자주한다.

이 소설은 일제시대부터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을 관통하여 현재까지 이어지는 한 가족의 가족사에 대한 이야기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특이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아니다.  보통사람들의 신산스런 삶이 여기에 그려지고 있다.  삶은 그래서 참 뭣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허하다. 그래서 제목이 ‘공터에서’ 가 아닐까? 힘들게 살아온 뒤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김훈의 지극히 건조한 문체도 이 헛헛함에 한 몫 한다. 책 내용 중에 막내아들인 마차세는 어머니 이도순이 임신 중 지우려고 했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나도 어머니께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 나는 4남매 중 막내였고, 녹녹치 않은 집안 형편 때문에 나를 가지고 난 뒤 지울려고 했다는 것이다. 왜 다시 나를 낳는 걸로 마음을 바꾸셨는지 한 번 물어봐야겠다.

‘마동수는 암 판정을 받은 지 3년 만에 죽었다. 간에서 시작된 암은 위와 창자로 퍼졌고 등뼈 속까지 스몄다. 뼈가 삭아서 재채기를 하다가 관절이 어긋났다. 마동수의 암은 느리고 길었다. 몸이 무너져갈수록 암의 세력은 번성했고, 마동수의 숨이 끊어진 후에도 암은 사체 속에서 사흘 동안 살아 있다가 사체가 매장될 때 소멸했다. 마동수의 암은 인체에 기생하지만 인체와는 별도로 독립되어 있었다.’ -8p

‘마차세는 관 옆에 붙어 서서 입관을 지켜보았다. 죽은 아버지의 얼굴은 말을 걸 수 없이 적막했고, 거기에 아무런 삶의 자취가 남아 있지 않았다. 죽은 자의 얼굴은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모르는 자의 대책 없는 무책임 속에서 편안해 보였다. 마차세는 아버지가 죽어서 더 이상 세상을 의식하지 못하고, 부대끼거나 쓸리지 않게 된 것에 안도했다.’ -44p

‘신부가 방 안으로 들어와서 병석 옆에 앉았다. 마동수는 배에 호스를 꽂고 누워 있었다. 신부는 이도순의 부탁으로 왔다고 말했다. 마동수는 실눈을 떠서 신부를 힐긋 보고 눈을 감았다. 신부는 죄의 사함을 믿고 영생으로 다시 태어나는 종부의 의미를 간단히 설명했다. 신부가 물었다. 

-마동수 님은 영생을 원하십니까.

마동수가 고개를 저었다. 얼굴에 아무 표정이 없었다. ….

-마동수 님은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시기를 원하십니까.

마동수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마동수가 눈을 떠서 신부를 바라보았다. 텅 빈 눈이었다. 신부가 고개를 숙였다. 신부는 새로운 이름으로 마동수를 씻길 수 없었다.’ -136p

‘아버지가 이 세상이 다시는 지분덕거릴 수 없는 자리로 건너갔다는 것은 어쨌든 아버지를 위해서 마지막으로 다행스런 일이었지만, 막상 죽음의 소식을 받고 보니 아버지가 건너간 자리는 아주 가까워서 아버지는 가지 않고 다시 이쪽으로 건너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가 땅 위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겉돌고 헤매이게 되는 생애의 고통은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소멸할 것이고 그 고통이 아무리 크고 깊다 한들 이 세상에 흔적을 남기지 못할 것이므로 아버지의 죽음은 살아 있는 사람이 휴- 하고 긴 한숨을 한 번 내쉼으로써 정리할 수 있을 만큼 가벼운 것이기도 했지만, 그 한숨 한 번 내쉬기까지가 어째서 그토록 힘든 일이었을까를 마장세는 생각했는데 생각이 되어지지가 않았다. ‘ -141p

‘마동수가 죽은 후에 이도순의 몸은 빠르게 무너졌다. 오래된 관절염에 불면증과 치매 증세가 깊어졌다. 마동수가 죽자 이도순의 병은 둑방이 터져서 물이 쏟아지듯이 제 갈길로 흘러갔다. 이도순은 마동수가 죽어서 원한의 대상이 없어졌으므로 자신의 생명도 머지 않아 소진될 것이라고 예감했다. 그 ‘머지 않아’가 언제쯤일지는 알 수 없었다. -237p

‘이도순의 병은 빠르게 진행되면서도 종말에 이르지는 않았다. 이도순은 기억을 거의 상실해 갔는데, 생애의 가장 고통스런 대목들만을 챙겨서, 더욱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망각의 시간들 사이사이에 기억이 되살아났고, 그때마다 이도순은 연극배우처럼 과거를 재현해 냈다. …. 이도순의 기억상실은 잊혀지지 않는 많은 것들 중에서 가장 잊고 싶은 것들만을 되살려내는 기억 회생의 병증인 것처럼 보였다.’ – 23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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