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 한강 (2007)

책 표지의 ‘연작소설’ 이라는 문구가 눈에 띄인다. 처음 채식주의자를 읽고 분량이 작아서 다소 당황했는데, 이어지는 ‘몽고반점’ , ‘나무불꽃’은 ‘채식주의자’와 이어지는소설로 합해서 하나의 작품으로 볼 수 있다. 각 소설마다 시점이 다르다. 아마도 그래서 ‘연작소설’이라는 부제가 붙었을 것이다. 발표된 시기가 차이가 있어서 독립된 소설로 간주되지만, 하나의 이어지는 얘기어서 하나의 제목아래 3개의 챕터로 해도 괜챦을 것 같다.

‘채식주의자’는 극단적인 채식을 하는 영혜라는 인물의 시점으로, ‘몽고반점’은 그런 영혜에게 몽고반점을 매개로 성욕과 예술에 대한 욕망을 동시에 느끼고 실현시키는 형부의 시점으로 그려진다. 마지막 ‘나무불꽃’은 그런 동생과 남편의 불륜을 목격한 인혜가 나무로 변해가는 동생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피폐해진다는 내용이다.

세 소설의 주인공들 모두 비정상적인 인물들이다. 특히 마지막 인혜는 정상적이었지만, (아니 정상적인 척하며 모든걸 견디며 살았지만) 비정상적인 동생과 남편때문에 점점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로 내몰리게 된다.  

영혜는 어느날 갑자기 꿈을 꾸고 난 뒤, 집안에 있는 모든 고기를 버리고 극단적인 채식주의자가 된다.  이렇게 갑자기 사람이 변하는 과정이 좀 느닷없다 싶지만 이해못할 바는 아니다. 이 부분에서 갑자기 곤충으로 변하는 카프카의 ‘변신’이 오버랩되었다.  아마 꿈을 꾸기 이전에도 그녀에게는 극단적 채식주의자가 될 만한 단초가 있었을 것이다. 꿈은 아마도 기폭제가 된 게 아닐까? 

나도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특정음식은 먹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집안에서 닭을 좋아하지 않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로 닭을 먹지 않은 이유는 대학교 때 기숙사에서 처음 접한 닭백숙 때문이었다.  커다란 냉면그릇에 담겨진, 머리를 제외한 닭의 형태와 닭살의 우둘투둘한 그 질감을 견딜 수 없었다.  그 뒤부터 닭 냄새를 맡으면 구역질을 하게 되었다. 누가 물어보면 닭에 알레르기가 있어서 먹지 못한다고 말한다.  개고기도 마찬가지다. 어느날 야외 농원에 회식을 갔었는데, 개고기 집이었다. 그때 전골형태의 일반적인 개고기와 함께 등장한 것이, 머리를 잘라내고 개의 형태가 그대로 드러난 바베큐 형식의 개고기였다. 게다가 옆에서는 살아있는 개들이 짖고 있었다. 그때도 충격을 받아 먹지 못했지만, 그 이후로도 개고기는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음식이 되었다. 특정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심리적인 면과 시각적인 충격도 함께 작용한다.

그래서 충격적인 꿈을 꾸고 난 뒤 채식주의자가 된 영혜를 이해할 수 있다. 그 꿈이 강박적으로 계속해서 사람을 압박한다면, 채식주의자로 돌변하는 것도 이해 못할 바가 아니다.

‘어두운 숲이었어. 아무도 없었어. 뾰죽한 잎이 돋은 나무들을 헤치느라고 얼굴에, 팔에 상처가 났어….. 얼어붙은 계곡을 하나 건너서, 헛간 같은 밝은 건물을 발견했어. 거적때기를 걷고 들어간 순간 봤어. 수백개의, 커다랗고 시뻘건 고깃덩어리들이 기다란 대막대들에 매달려 있는 걸. 어떤 덩어리에선 아직 마르지 않은 붉은 피가 떨어져내리고 있었어….. 내 입에 피가 묻어 있었어. 그 헛간에서, 나는 떨어진 고깃덩어리를 주워먹었거든. 내 잇몸과 입천장에 물컹한 날고기를 문질러 붉은 피를 발랐거든…. 그렇게 생생할 수 없어, 이빨에 씹히던 날고기의 감촉이. 내 얼굴이, 눈 빛이. 처음 보는 얼굴 같은데, 내 얼굴이 아니었어. 설명할 수 없어.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 생생하고 이상한, 끔찍하게 이상한 느낌을.’ -19p

채식을 시작한 후 그녀는 나날이 여위어가고, 가족들의 걱정과 강압은 심해진다. 결국 아버지에게 쳐맞고 손목을 그어 버린다.  가족들이그녀가 건강하게 채식할 수 있도록 도와줬으면 좋았을텐데 굳이 고기를 억지로 먹여야만 했을까?  아버지는 가족들은 기존 질서를 상징한다. 그리고 기존질서는 울타리 밖으로 나가려는 자를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몽고반점’에서 영혜의 형부는 비디오아티스트 작가다.  그는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를 넘나든다. 아니, 일상적인 일들은 경제적인 것, 육아까지 포함해서 아내에게 맡겨두고, 본인은 자신만의 예술세계에 머무른다. 그리고 기존질서에서 튕겨져 나간 ‘영혜’에게 관심을 갖는다.  그가 처제인 영혜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몽고반점 때문이었다.

‘그가 처제를 달리 생각하게 된 것은 분명히 아내에게서 몽고반점에 대한 말을 들은 다음이었다. 그러니까, 그전에 그는 조금도 처제에게 딴마음을 품은 적이 없었다. 처제가 그의 집에 있는 동안 보였던 행동들을 기억할 때 그의 몸에서 치밀어 오른 관능은 추체험에 불과한 것이었다. 베란다에서 손을 활짝 벌려 그림자를 만드는 그녀의 넋잃은 모습, 그의 아들을 씻길 때 헐렁한 트레이닝복 바지 아래로 드러나던 흰 발목, 방심한 자세로 비스듬히 앉아 텔레비전을 보던 모습…… 그 모든 기억 위로 푸른 빛 몽고반점이 찍혀 있었다. 퇴화된, 모든 사람에게서 사라진, 오로지 어린아이들의 엉덩이와 등만을 덮고 잇는 반점. 오래전 갓난 아들의 엉덩이를 처음 만지며 느꼈던 말랑말랑한 감촉의 희열과 겹쳐져, 그녀의 한번도 보지 못한 엉덩이는 그의 내면에서 투명한 빛을 발했다.’-87p

사회가, 혹은 관습이나 질서가 그어 놓은 선을 넘기려면 계기가 필요하다.  이혼하고 기존관습에서 벗어나 이미 이쪽이 아닌 저쪽에 영혜가 있다. 그리고 비일상에서 주로 머무르는 그는 어느 순간 영혜가 자기와 비슷한 영역으로 넘어왔다고 느낀다. 아마도 동물적인 감각으로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성욕과 예술에 대한 욕망이 불분명하게 뒤섞인 작품을 그녀와 함께 만들게 된다. 이 작품은 일반적인 사람의 관점에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 후 영혜는 정신병원으로 옮겨지고, 그도 소식이 끊기게 된다.   

세 사람 중 가장 정상적으로 보였던 ‘인혜’가 세번째 소설인 ‘나무불꽃’의 주인공이다. 그녀는 많은 것을 견디며 살아왔다.  그녀는 견디기 힘든 사건들을 겪고 난 후 마침내 깨닫는다. 

‘그녀의 고단한 삶은 연극이나 유령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이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더이상은 견딜 수 없다.

더 앞으로 갈 수 없다.

가고 싶지 않다. 그녀는 다시 한번 집 안의 물건들을 둘러보았다. 그것들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것과 꼭 같았다.  -200p

그녀는 극단적 채식을 넘어 이제 나무가 되려하는 동생을 돌보러 가지만, 사실은 그녀가 이 모든 것을 겪고 난 뒤 텅 비어 버린 것 같다. 

‘그녀는 계속해서 살아갔다. 등뒤에 끈질긴 추문을 매단 채 가게를 꾸려나갔다. 시간은 가혹할 만큼 공정한 물결이어서, 인내로만 단단히 뭉쳐진 그녀의 삶도 함계 떠밀고 하류로 나아갔다. -169p

‘산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그 웃음의 끝에 그녀는 생각한다. 어떤 일이 지나간 뒤에라도, 그토록 끔찍한 일들을 겪은 뒤에도 사람은 먹고 마시고, 용변을 보고, 몸을 씻고 살아간다. 때로는 소리내어 웃기까지 한다. 아마도 그도 지금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 때, 잊혀졌던 연민이 마치 졸음처럼 쓸쓸히 불러일으켜지기도 한다.’ -204p

소설이 끝나고 난 뒷부분에 평론가의 글이 있다.  ‘허윤진’ 이라는 평론가의 글인데, 평론을 소설쓰듯이 하고 있다. 답답하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본인의 지식을 혹은 글재주를 자랑하기 위해 한껏 현학적으로 쓴 것 같다. 이런 류의 평론 글을 싫어한다. 아마 이 평론 글이 없었더라면 좀 더 완벽한 책이 되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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